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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예술(脫藝術)에 관하여

2014/02/16

Haeju Kim: 이번 R:ead 는 오랫만에 만나 각자가 작업하고 있는 환경과 관심 속에서 가지고 있었떤 문제들을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아요. 각자 현대미술과 비평적 디자인이 봉착한 한계를 짚어 보며 이에 대한 체념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죠. 그런데 이 한계라는 것은단지 예술의 장 내부에서만 만나는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R:ead가 끝나고 돌아온 날 서울에서는 경찰이 민영화에 반대해 파업을 벌인 철도노조의 간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민주노총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고, 12월 28일 서울도심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어요. 새 정부 들어 최대 규모의 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한 번쯤은 불길이 제대로 붙기를 바랬었는데,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경찰의움직임에 비해 시민 시위대는 결속된 힘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어요. 결국 어수선하게 끝난 시위 며칠 후에 철도노조의 파업은 중단되었고, 민영화 반대의 목소리도 한결 사그라든 느낌이에요. 이러한 아쉬움의 경험들이, 지속적인 운동과 항의를 조직하는 힘을 약화시키고, 점차 시민의 정치적인 힘에 대한 신뢰를 무너트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되요. 예술 실천에서 느끼는 한계나, 현실의 문제를 항의하는 방식에서 느끼는 한계에서 비슷한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탈예술’은 예술 안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뿐 아니라, 예술 밖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이중의 미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 되네요. R:ead 이후의 서울의 풍경을 어떻게 보셨는지, 그리고 ‘탈예술’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하네요.

Hwang Kim: 굳이 다시 언급 함으로 이 글을 시작하자면 저에게 R:ead 는 새로운 어떤것을 찾는 것이 아닌, 지금 고민하는 것들, 머리 주위의 허공에 떠도는 것들을 확실하게 언어화/문자화 하기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하자는 스스로의 순수하지 않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비평적 디자인을 표방하며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고, 질문을 받으면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부분(해당 질문이 가장 많이 나오는데에도 불구하고)이 바로 디자인이 진보를 외치는데 결국은 예술에서 방법론을 차용한다. 였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저는 보통 1.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의 기능성에 대해서 언급 해왔습니다.(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고, 예술은 문제를 발견하는 행위다.) 그리고 2. 소유의 커뮤니케이션: 예술 작품은 대중이 소유할 수 없고 시각적으로 보는 것으로 소통한다.(이미지) 하지만 디자인은 대중의 소유가 가능하니 완벽한 소유권으로 인한 소유자 스스로의 파괴등이 가능하다.(오브제) 물론 어느정도 설득 가능한 논리기는 하나 스스로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제가 스스로 찾은 행위가 탈예술 행위였음을 인지하게 된것이지요. 사실 제 피자작업에도 이러한 성향이 있으나, 이때는 철저히 영감에 의한것이지 스스로 논리화 되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READ에 가기 오래전에 승효(페스티벌 봄 예술감독) 씨와 대담한 것을 보면…

(e-mail 대담중 발췌) —————————-

황: 제가 승효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을 해체시키고 싶다.’ 사실 이 전시를 통한 제 욕심은 그랬지요. 저나 승효씨나 예술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예술보다 사회 자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와 승효씨는 서로 그 비젼을 공유하는데 이 전시는 일종의 첫 번째 실험 이었습니다. 예술의 사회화 이지요. 예술의 대중화와는 달라요. 사회적인 예술이 아니라 즉, ‘정치/사회적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그런 작업을 하는 작가적인 성향이 많은 디자이너’가 아닌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일종의 활동을 하는 사회/정치 사상가 또는 선동가’ 되겠네요.

승효: 네 맞습니다. 사실 제가 다원예술 이야기를 꺼내면 예술계에서는 지나간 아젠다를 왜 이제와서 건드리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렇지만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김황씨가 정확히 지적하신대로, 사회적인 예술이 아니라 예술 바깥에 혹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활동이거든요. 그들중 누군가는 보다직접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예술의 형식들을 차용하면서 좀더 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을텐데, 저는 후자를 새로운 다원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싶은 것이에요. 굳이 왜 정의를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기금이나 정책에서의 다원예술은 조만간 곧 사라지더라도 그에 관계없이 다원적인 작업들은 이미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하지 않으면 논의 자체를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비평적 디자인 전시를 제가 페봄에서 하고자 하는 이유중 하나는, 디자인을 다원예술에서 차용가능한 하나의 중요한 매체로 인식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또한 디자이너들의 방법론과 형식이, 포스트드라마연극이나 농당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원예술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단어 선택에는 조금 신중하고 싶지만 저도 굳이 말하자면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일종의 활동을 하는 사회/정치 사상가 또는 선동가’중에서 직업이 디자이너인 사람들을 소개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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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 전에도 어렴풋이 탈예술에 관하여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할수가 있을것 같습니다. 사실 탈예술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지만 제 작업의 방향성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생각하고 있어요.

얼마전 나연우씨와 만나서 페스티발에 관하여 이야기 한적이 있었습니다. 한때 페스티발이라 함은 예술의 진보화를 이끌어왔던 것인데, 과연 지금은 어떤가. 쏟아져 나오는 페스티발이 과연 담론을 형성해 가고 있는가. 이제는 새로운 대안적 페스티발이 출몰해야 할 때가 아닌가. 라구요. 물론 깊이 공감하는 점이 있었지만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예술적 진보를 위한 진보적 사고들은 안타깝게도 제가 보기엔 현제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점들에 비하면 뭐랄까 굉장히 소소한 문제들로 느껴진달까요?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이를 지켜보며 저의 예술적 행동이 시시해 보인달까요.(이것은 병이라면 병이고, 거만이라면 거만이겠지만요.) 결국 저는 사회적 활동이나 행위와 연계되어 있는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탈예술의 다른 축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아직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READ의 리서치도 어떠한 스트럭쳐를 가지는 ‘탈예술’적인 리서치가 되어야 할것 같다고 생각해요.

Haeju Kim: ‘탈예술’에 대한 아이디어와 더불어 김황씨가 지금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큐레이터는 창작자와 관객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면서 제도와의 타협점을 찾아가는 측면이 있거든요. 저 역시 독립 큐레이터이지만 기관에 속해있지 않을 뿐, ‘미술’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제도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항을 주장하는, 독립성을 주장하는 어떤 기획도 제도에 대해 인식하지 않고 시작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김황씨의 ‘탈 예술’과 큐레이팅이 어떻게 만날 지 관심있게 보고 있어요.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을 해체하고 싶다’라는 언급은 큐레이션을 통한 탈 예술 실천의 시작으로 보이거든요.

이 같은 논의에서 최근에 읽은 글이 유사한 쟁점을 다루고 있어서, 공유하고 싶어요.
<큐레이팅이란 무엇인가?>(폴 오닐 엮음, 현실문화, 2013)라는 앤솔로지에 실린 마크 허친슨과 데이브 비치의 대화입니다. (http://www.markhutchinson.org/writing/writing%20inconsequential%20bayonets.html)
큐레이팅의 독립성과 협업의 가능성에 대한 대화에서 이들은 ‘반(反)예술’과 ‘반(反) 큐레이션’을 얘기하고 있어요. 데이브 비치의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반예술의 전복적 잠재성은 예술을 희생시켜 예술 이외의 무언가-배제된 것, 일상적인 것 등과 같은 -를 성취하려는 게 아니다. 예술은 반예술의 전복적 잠재성으로 인해 예술에 내재되어 있지만 예술이 지지하길 거부하는 것에 대항한다. 정확히 바로 이같은 의미에서 반예술은 예술의 변증법적 변환, 즉 부재의 부재이다. 반예술은 예술에 변화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뜻한다.”

“큐레이터가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전문성, 경쟁력, 기술 등의 모델로서의 반예술이 선호된다. 따라서 ‘다른 무언가를 하는’일은 공모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과 입장을 나타낸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독립이 언제나 무언가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면, 공모는 언제나 무언가-시장, 미술제도, 역사, 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개념, 미술 애호가의 인류학-와 공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른 무언가를 하는 ‘일은 시장, 미술제도, 미술사 등 특정 제약에 저항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반예술에서 배울 수 있듯이, 공모(들)에 대한 저항은 개인의 실천을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공식적인 담론이 억압하거나 배제한 사회적 맥락으로 예술을 방해하고 오염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다. ”

물론 김황씨가 말씀하신 ‘탈예술’은 ‘예술에 내재되어 있는 것 중 예술이 지지하길 거부하는 것’을 드러낸 다는 ‘반예술’의 의미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것으로 느껴져요. 궁극적으로는 예술 바깥에서 방법과 실천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번 전시와 같은 경우는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디자인이고, 표출되는 방식이 전시라는 점에서 아직은 예술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어쩌면 이것은 탈예술로 가기위한 점진적인 초기의 시도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설명하는 반예술적 실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대화에서 데이브 비치는 또한 반-큐레이션을 실천한 사례로 예술가가 큐레이팅한 몇몇 전시를 예로 들고 있어요.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전문적인 규범에 따르는 전시이기 보다는 갈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이죠. 큐레이터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매개자의 역할, 해석자의 역할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관계를 폭로하는 사회 내부의 협력자라 볼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지금 김황씨가 기획하고 있는 ‘비평적 디자인’ 전시가 반예술 (혹은 탈 예술)을 다룰 뿐만 아니라 반- 큐레이션 혹은 탈-큐레이션의 실험장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실행될 수 있을까요?

Hwang Kim: 사실 저의 탈예술이나 탈큐레이팅은 지금까지 예술이 가진 스트럭쳐나 제도에 반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예요. 말그대로 공격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 제도가 틀렸으니 뒤집어 엎자는 것도 사실 아닌것 같아요. 지나친 회색론일수도 있지만 사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꼭 이게 맞다 틀리다가 없거든요. 약간 도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요.

지금 제가 흥미로워 하는 것들/하고 싶은 것들은 스스로가 행복해지고 타인들의 삶의 부정적 무게들을 조금 덜어주는 것(즐거움을 주는 것) 같아요. 타인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더 좋겠구요. 그러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회체계가 긍정적으로 변화할때’ 사람들은 즐거움을 얻는것 같습니다. 절대로 바뀔 것 같지 않던 이 부조리한 사회가 긍정적으로 바뀔것 만 같은 희망이 있을때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통일을 생각하는 것이고, 이 시대를 더 명확하게 바라봐야하는 시대성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아울러 다음 사회를 상상하고 고민하고 제안하지요.

저는 예술가 이기에 이러한 행위를 예술이라는 형태로 표현 하고자 하는것인데, 그러면서도 너무 기존에 보아왔던 예술의 형태로 하고자 하지는 않아요. 즉, 고민을 작업으로 표현을 하는데, 사실 작업이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수가 있을수도 없을수도 있는 것을 하고자 합니다. 해주씨가 공유해주신 글, 마크 허친슨의 글을 발췌를 하자면…(영어로 주셔서 다 읽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ㅎㅎㅎ)

“나는 이것을 덧붙이고 싶네: 다른것을 한다라는 의미는 큐레이터로서 큐레이터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I want to add this: doing something else means being something other than a curator as a curator.)”

“그러니까, 만약 큐레이터가 다른것을 하다면 – 아울러 다른것이 된다면 – 나는 이 ‘존재’가 현존하는 체계를 다르게 사용한다는 데에 동의하네. 하지만 나는 더 나아가 이 ‘존재’가 기존과 다른 체계 조차도 다르게 사용한다고 제안하고 싶네. (Hence, when and if the curator does something else – and becomes something else – I agree that this ‘being’ occupies existing structures differently but I want to go further and suggest that this ‘being’ also occupies different structures differently.)”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왜 기존과는 다르게 하고 싶을까’ 일텐데. 이건 제가 봤을땐 업(Karma) 같아요. 결국 ‘변화’와 ‘창조’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겠지요. 기초적인 작업의 영감이 되는 사회체계도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고, 그 방법론으로서 차용하는 예술도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고. 이러다보니 다른 분야에서 여러 방식들을 차용하기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그 체계가 싫어서 ‘반예술’하기 보다는 자연스레 ‘탈예술’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업’으로 하여금 예술의 범주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해주씨께서는 더 적극적이지 않느냐고 했는데, 저는 오히려 소극적이고 관조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를 보더라도, 사실 저는 진보도 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보수에 반하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를 떠안고 함께 갈수 있는 진보가 필요할때라고 보아집니다. 안그러면 이길수가 없어 뵈요. 제 작업인 ‘소비배급거래제(http://www.hwangkim.com/crts.html)’를 보면 제 고민이 잘 나와있는데, 결국 자본주의가 성공하려면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강제적인 복지의 증가도 아닌, 자발적인 기부의 증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망인 소유욕에 반하는 것이며 말도 안되는 거지요. 제 작업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 부자들이 노숙자에게 돈을 주려고 줄을 서있어요. 이런 느낌으로 보수를 안정시키는 거죠. 우리가 집권해도 너희들 밥줄은 다 안전하니까 걱정마. 너희들 지켜주면서 진보할께…

여기에 다른 한 측면을 덧대자면 저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는것 같아요. 작업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인생을 보고싶어 하구요. 그런 의미에서 그냥 삶을 살았는데 인생이 예술인 사람들을 찾아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요. 저는 그들보다는 업이 예술이니까 더 적극적으로 예술로 표현을 하겠지만요. 예를들어 제가 예술가가 아니었으면 그저 북한에 피자 디비디 보내고 말았겠지만 저는 그걸 전시든 공연이든 만들었듯이요.

결론짓자면:

황의작업 = 시대성/진보된 사회 체계(황의 고민) + 융합형 예술/체계 진보된 예술(황의 업) > 자연스럽게 탈예술(황의 작업/인생) > 예술의 형태로 프리젠테이션(황의 작업)

황의 비평적 디자인 전시 큐레이팅 = 시대성/진보된 사회 체계(황의 고민) + 융합형 예술/체계 진보된 예술(황의 업): 예를들어 지금 함께 작업하는 옹카/노암의 광주 518에 대한 작업은 시각예술도, 공연도, 관객참여형도, 디자인도 아닌 무언가. > 전시의 형태로 프리젠테이션(황의 큐레이팅): 근데 사실 이마저도 굳이 전시라고 하면 전시이지만 이게 전시라고 해야할지. 공연이라고 해야할지…

READ는 예전에 이야기 했던데로 자연스럽게 탈예술한 이들을 리서치 하고 이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정립하여 다른 예술가에게 한번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은 고민중입니다. 예술가가 제 리서치를 대본삼아 연기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