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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생하다: 개왕전(開王殿)의 이야기

2015/01/21

타아남에서 몇 걸름만 가면 한 절과 만나게 된다. 무슨 신명을 모시는지 무관하여 다들 중중첩첩하고 극히 염려하다. 반짝반짝한 현대화적인 등불을 더하여 마치 도시에 가장 활기찬 곳같다. 신명은 인간의 일상생활, 그리고 도시 공간에 이렇게 혁혁한 자리에 차지하는 것은 다아남에만 있는 느낌이다. 그라나 가우숑에 있는 개왕전(開王殿)은 완전 다른 면목이다.
가우숑의 개왕전에 온 시기는 한 무더운 오전이었다. 멀지 않는 곳은 ‘국정 고적’ 인 중도 당영전요창(中都唐榮磚窯廠)이다. 이 사이에 모든 건축물을 없애버려 초라한 황무지이자 잡초들이 즐겁게 자라 있다. 개왕전은 타이남의 절의 큰 광경과 빛깔이 환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 작고 열린 한 칸이 불과하다. 모든 진열 상황은 이를 지키는 늙은이처럼 나이를 많이 먹었다.
우리가 방문할 것을 알게 돼서 노인 몇 명이 이를 위해 오셨다. 그들은 가우숑 대학교의 양 선생과 같이 우리에게 개왕전의 역사를 소개한다. 중도 당영전요창(中都唐榮磚窯廠)의 전신은 일본인이 1899년에 이곳에 건설한 공장이었다. 창립 이래 애하천(愛河)의 운송과 자원의 우세로서 연안의 점토와 주변 시산(柴山)이 제공하는 나무 재료로 공장의 장사가 번창하여 펑후와 타이남에서 큰 규모의 이민을 끌어왔다. 그 후에 신중국의 창립하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전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 공장의 주인도 바꾸었지만 TB벽돌의 판매량이 대폭 올랐고 심지어 홍콩의 학교 건설까지 지원했다. 우리를 열정하게 접대하는 아저씨도 그 당시 공장에 일했던 소년노동자였다.
벽돌공장과 같이 나타난 것은 바로 개왕전였다. 그 당시에 이곳으로 이민하여 벽돌 만들기로 생활을 유지하는 남녀노소는 밤낮을 구분하지 않아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료적과 생활적 보장을 얻지 못하였고 치료과 약을 구하는 길도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기가 만든 벽돌로 개왕전을 지었고 자기 고향의 신명을 모신다. 양 선생의 말로는 그 잔혹하고 착취하는 시대, 의료 조건 최악의 상황에서 개왕전은 그들의 의탁이고 의료와 사회 보장의 중심이었다. 한 아줌마가 개왕전의 기록부를 집에서 가져왔다. 그 안에 수백 년간 가가호호가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어느 집에 며느리가 미쳐버리고, 어느 집에 누가 불치병을 앓았고, 어느 사람이 말할 수가 없었고……. 이 기록을 쓴 다음에 주사자(主祀者)가 처방을 적고 약을 내어 신명을 청한다. 부지불식간에 한 신체와 정신적인 긴장감을 확 찬 사회 생활사를 기록하였다. 아줌마가 기록부에 있는 글씨를 판독하면서 개왕전의 신명이 얼마나 신통하는지, 당시에 먼 사람까지 와서 모신 성황를 강조했다. 아저씨가 개왕전의 신명이 이렇게 신통하는 이유가 중국 대륙에서 직접 분가해 오는 것이었고 대만에서 차례가 아주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후에 많은 대만 절의 신명들은 개왕전에서 분가 나간 것이고 법력이 부족할 때 다시 돌아와 개왕전의 신명에게 가르침을 요청해야 한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신명 신양 세계에 성장하지 않았는 저에게는 이 신명 간의 관계, 그리고 노인들이 개왕전에 대한 신양과 감정을 이해하기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작고 낡은 개왕전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벽돌 공장이 내 머리에 극히 선명한 화면을 성형시켰다. 이 벽둘 공장을 세웠을 때 그 당시 최첨단의 벽돌 공예를 수입했다고 한다. 오늘날에 이 폐기한 벽돌 공장을 보아도 기세가 없지 않는다. 그러나 하루 중일 노동하는 노동자를 보장하고, 요괴를 퇴치하고, 질병을 없애 현대화적인 벽돌 공장을 계속 운영하고 영리하게 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고향에서 모셔 온 신명이 주관하는 이 눈에 띄지 않는 개왕전일 뿐이다.
알다시피, 그 당시의 ‘현대화’ 벽돌 공장은 가우숑의 땅의 자연 자원에 기생하고 있었고, 노동자들의 분발한 노동력에 기생하고 있었고, 여러 곳에 온 신명을 모시는 ‘봉건․미신’적인 개왕전에 기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정자가 이러한 현대사를 정시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 같고, 이 기생성(寄生性)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능력조차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인터넷에 아래와 같은 ‘고적’을 인정하는 이유를 읽어봤다.
1. 당영전요창(唐榮磚窯廠)은 대만 20세기 벽돌 재료 생산 공업의 중요한 입증이다. 현존하는 건물 중에 팔괘요(八卦窯)와 굴뚝의 연대가 멀고 오래며 공법 섬세하다. 보존 상황은 상당히 완정하다.
2. 벽돌 재료는 대만 지역에 혼응토와 강철 재료 기술 발전 전의 가장 중요한 건축 재료다. 공장 현존 시설 팔괘요와 두 굴뚝은 깊은 역사와 문화 의의를 가지고 있어 보존 가치가 극히 크다.
3. 유사한 벽돌 재료 생산 시설은 대만 각 지역에 이미 보기 힘든 것이다. 당영전요창(唐榮磚窯廠)의 규모가 가장 크고 후기에도 신식 생산 시설을 증가하는 것으로 생산 기술의 진화․발전을 보인다.
4. 각각 다른 생산 시설을 공존하여 산업 문화의 희귀성, 대표성, 완정성을 가진다.
5. 산업 관점으로 말하면 가우숑 시 공업화의 진행 과정에 중요한 입증이다. 이는 건축 재료를 제공하는 산업 차원에서도 대만 공업과 경제 발전 진보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
이것으로 판단해 보면 역사에 대한 존경하는 척하는 집정자가 실제로 말하려는 것은 ‘경제’ 에 대한 중시와 ‘현대’에 대한 경앙뿐이다. 그들의 눈으로 보는 ‘가치가 있는 역사’ 가 무엇이냐면, 바로 ‘경제비상’ 과 ‘기술진보’ 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화와 비상을 시킨 땅에서 무슨 기생하는 생활을 발생했는지 완전히 무시하였다.
오늘날, 이 기생적인 성격이 있는 현대사를 잊히거나 삭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세계 각 지역의 발전주의자의 통폐다. 그래서 가우숑의 새로운 토지개발과 애하 연안 고급주택의 건설과 수반하여 중도 당영전요창(中都唐榮磚窯廠)은 ‘현대’ 의 화신(化身)으로 보류되었다. 그러나 개왕전 대표로 벽돌 공장을 지지하는 생활 마을은 이미 깨끗이 제거되어 아무도 남지 않았다.
타카하시 테츄야(高橋哲哉)가 후쿠시마 문제를 토론할 때 이렇게 “희생의 체계” 를 정의하였다. “희생의 체게 속에서, 어떤 사람의 이익은 타자의 생활(생명, 건강, 일상, 재산, 존엄, 희망 등)을 지속적으로 희생하여 생산되는 것이다. 비희생자의 희생이 없다면 희생을 요구하는 쪽은 이익을 발생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이익을 유지하기도 못한다. 그러나 이 희생은 항상 은폐되거나 한 공동체(나라, 국민, 사회, 기업 등)의 ‘존귀의 희생’으로 미화됐거나 정당화되었다.
만약에 타카하시에게의 초점은 희생은 어떻게 일본 문화 속에 공통채의 명의로 정당화와 숭고화이라면, 그럼 저에게는 더욱 흥미로운 질문은, 여러 가지 식민과정으로 발전되는 아시아 나라와 지역에게 특수 발전을 위한 희생을 요구되는 체계는 어떻게 계속 은폐할 수 있는가? 서양에 대해 말하자면 이 희생 체계는 ‘암흑의 마음’ 혹은 동양주의 속에 더욱 많이 체험되었다면 아시아나라나 지역의 사람들에게 적나라한 희생과 식민지 개척자의 기생하는 것보다 더욱 생동적인 역사 경험이 없다. 이는 희생 체계를 저항할 만한 말씀이고 그리고 단순한 현대적인 환상을 벗어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식민을 당한 여러 아시아 나라들은 이에 대한 특수한 면역력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경제주의의 말씀으로 역사경험을 바꾸어 쓰는 것은 이 시대의 주류가 되어 버렸다. 희생을 당한 역사경험은 도대체 어떻게 문화 측면의 경제주의 조작으로 은폐되었는가? 이르기까지 이 희생이나 기생한 감각구조를 양성하는 것을 받아드리고 무시하게 됐다? 자기 자신을 정의감 충만한 인간으로 여기는 현대 도시인에게는 비슷한 구조인 희생 체계는 그들의 도덕 이념과 공존할 만하는가?
이를 말하자면 개광전의 이야기는 간혹 답안을 제공하였다. 정부가 주도하는 모든 현대 역사의 상상과 교육이 이에 대한 미를 수 없는 책임이 있다. 만약 소위 ‘현대화 발전의 유적’ 은 항상 ‘중도 당영전요창(中都唐榮磚窯廠)’등 경제비상의 상징을 보존하지만 ‘개왕전’등 실제적으로 이 경제비상의 사회생활을 지지하는 것을 삭제한다면 ‘희생이 필요 없는 발전’ 혹은 ‘자기 원만의 현대화’는 역사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고정화시킨 발전방식이 되었다. 이 기초로 하는 발전에 대한 상상은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생활 기석이 되었다. 역사를 분해하여 국부적인 경제 발전적인 ‘역사교육’으로 사람들이 살제 존재했던 희생/기생을 안 보이게 한다. 더하여 천진난만하게 생각하되 현대역사가 희생을 하는 사람과 기생하는 토양이 없어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동행자가 농담을 삼아 말했다. “개왕전의 신명이 이렇게 영통하신다면 자기를 가우숑 시 정부의 개발계획을 피해 없애버리지 않게 하지 않아?” 그 어렸을 때부터 벽돌공을 해 온 아저씨가 말했던 ‘고적 보호’ 에 대한 평가를 생각난다. 그 아저씨가 ‘건축 수선 공사는 공장 구조를 숙지한 우리 늙은이들을 배제하고 공장 구조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 진행했다. 표면적으로 보기 좋게 수복 강화를 했는데 실제적으로 건축물의 부담을 가해 더욱 쓰러지기 쉽게 만들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역사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물론 벽돌공장과 개왕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기생자와 피기생자의 조합이다. 벽돌공장이 ‘국정 고적’ 이 될 때 개왕전과 이를 사랑하는 노인들까지 보존하고 상속해야 한다. 만약에 이 전체성과 피기생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무시하고 현대화가 스스로 완성됨의 환상에만 매두몰신하면, 현대화 ‘고적’ 은 와르르 무너질 때가 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혹시, 신명의 위력, 혹은, 역사의 신판이라고 한다.

2014년 10월 27일 상하이에서.